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이스 켈리 (문단 편집) === 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AE9A4FD-2482-4726-9AF0-C0EF8C6B0449.jpg|width=100%]]}}} || || '''1955년 5월 6일 첫 만남''' || 이후 [[칸 영화제]] 주최측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간 그레이스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잡지사 [[Paris Match]]가 모나코 공(公)[* [[모나코]]의 국가 원수는 왕(王, King)이 아닌 공(公, Prince)이다.] [[레니에 3세]]와의 만남을 제안한 것. 둘은 1시간 20분간 궁을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레이스는 칸으로 돌아가면서 레니에 3세를 매력적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레니에 3세는 궁의 개인 상영실에서 그레이스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상영하도록 지시했다. 레니에 3세의 친구들은 그가 그레이스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7개월간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가까워졌고, 1955년 말 레니에 3세는 뉴욕으로 향했다. 공식적으로는 건강검진을 위한 방문이었으나, 사실 그레이스에게 청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몇 차례의 만남 후 뉴욕에서 열린 비공개 파티에서 그레이스에게 청혼했다. 10.47캐럿의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유명한데 사실 처음 받은 반지는 모나코 국기 색의 루비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영화 <<상류 사회>>에서 소품 반지를 착용할 예정이었으나 레니에 공이 진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 것. 그레이스는 영화에 실제 반지를 착용하고 나온다.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 《[[필라델피아 스토리#1956년 개작|상류 사회]]》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켈리가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면서, 불과 5년여 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477506422-kelly-wedding.jpg|width=100%]]}}} || 1956년 4월 18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1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로 켈리는 주로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 켈리를 모나코 왕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니에 3세가 공이므로 켈리는 '공비(公妃, Princess)'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공'이라고 하면 독립국의 군주가 아니라 신하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모나코 뿐 아니라 다른 유럽의 대공국/공국 군주들도 모두 '왕'이라고 부를때가 많다. 같은 경우로 중국에 수출된 한국 사극에서 왕이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독립국 군주라는 이미지가 안떠오르기 때문에 조선 황제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불리게 된다. 그녀가 [[프랭크 시나트러]]에게 [[미국 달러#s-9.1|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 드라마틱한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 및 추측과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https://m.sports.khan.co.kr/view.html?artid=200604182143203&code=561201#c2b |오나시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